수주 가뭄’, ‘가동 중단’, ‘폐업’, ‘희망퇴직’. 최근 5년간 국내 조선업 뉴스에 꼬리표처럼 달렸던 키워드다. 어둡기만 했던 조선업에 반전의 시그 날이 찾아온 건 지난해 4분기부터다. 연이어 수 주 소식이 들려오면서 ‘훈풍’, ‘싹쓸이’, ‘일감 폭 증’ 등 메시지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끝이 보이 지 않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희망의 빛을 보는 것일까? 오랜 침체가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요즈음이다. 일각에서는 지금 상황이 과거 ‘슈퍼 사이클(장 기 호황)’ 진입 전인 2000년대 초반과 유사하 다는 이야기도 한다. 과연 조선업은 과거 영광 을 재현할 수 있을까?
잇따른 수주 낭보 속 우려도 함께 커져
최근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업체 클락슨 리서치는 전망 보고서 ‘클락슨 리서치 포캐스트 클럽’을 통해 올해를 기점으로 선박 발주량이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 고 밝혔다. 클락슨 리서치는 2021년과 2022년 연평균 선박 발주량이 2019년 대비 약 5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 다. 세계 경제 회복과 그에 따른 글로벌 물동량 증가, 국제 해사기구(IMO) 환경규제 등에 힘입은 것이다.
여기에 중장기적으로 선대 교체 수요가 더해지면서, 향 후 10년간 연평균 발주량이 지난해 대비 2배 이상 증가한 1,800척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1만 5,000 TEU급 이상 대형 컨테이너선은 지난해 대비 최대 2~3배 이상 증 가한 250~300척이 매년 발주되며, LNG운반선 역시 연간 60척 이상의 견고한 발주 흐름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그룹의 수주 실적 역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국조 선해양은 올해 5월까지 선박 122척(해양플랜트 2기 포함), 108억 달러를 수주하며 5개월 만에 연간 목표 149억 달러의 72%를 달성했다. 이는 지난 한 해 실적인 106척(94억 달 러)을 뛰어넘은 수치다. 삼성중공업 역시 올 들어 5개월 만 에 지난해 연간 수주실적을 뛰어넘었다. 잇단 수주 소식에 힘입어 한국조선해양의 주가는 5월 중 최고 16만 3,500원까지 오르며 52주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시장에서는 조선업 슈퍼 사이클 재연에 대한 기대감이 나오고 있지만, 한편에선 우려도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코로나19라는 전대 미 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펼친 전 지구적인 양적 완화가 원자재값 상승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고, 불황 속에 숨을 죽여왔던 중국 등 경쟁국의 조선소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확보하는 것 역시 우리가 넘어야 할 허들이다.
원자재값 상승으로 후판가 급등, 부활하는 경쟁국 조선소들
최근 언론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란 단 어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초(超) 인플레이션이라고도 하는 이 용어는 통제 상황을 벗어나 1년에 수백 퍼센트 이상으로 물가상승이 일어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정부나 중앙은행이 과도하게 통화량을 증대시킬 경우에 발생한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발생은 물가상승으로 인 한 거래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실물경제에 타격을 미치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세계 각국 정부는 너 나할 것 없이 경 기부 양을 위해 통화량을 늘리는 양적완화 정책을 펼쳐왔다. 우리나라의 시중 통화량 역시 지난해 4월 처음으로 3,000조 원을 돌파한 이후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며 매월 사상 최대 치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2021년 3월 중 통화 및 유동성’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월 시중 통화량 은 3,313조 1,000억 원으로 전월 대비 38조 7,000억 원 (1.2%) 증가했다. 지난해보다 11% 증가한 수치로 최근 10년 간 최고 증가율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4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4.2%로 발표되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논쟁 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기 회복에 따른 소비심리 상승 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최근 미국의 물가 급등도 경기 활황의 산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올해 미국의 GDP 성장률은 보수적 추정으로도 6%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양적완화 정책의 영향으로 원자재값 역시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주요 산업재인 철광석 가격은 올해 초에 이 미 예년보다 2배 이상 높은 톤(t) 당 160달러대를 기록하며 고공행진 해왔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5월 초 철광석(중국 칭다오항 기준) 가격은 처음으로 톤당 200달러 를 넘어섰다. 철광석 가격이 급등한 이유는 글로벌 경기가 반등하면서 철강 수요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 세계철강협회는 올해 철강 수요를 작년 대비 4.1% 증가한 17억 9,300만 톤으로 예상하고 있다.
철강 가격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원가 부담을 느낀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인상을 고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대형 차량에는 평균 1톤의 철강재가 들어가는데, 완성차 가격에 서 철강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7% 수준이다. 철광석 가격 상승 압박은 조선업종에서 더 무겁게 다가온다. 선박 한 척의 가격에서 후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완성차보다 훨씬 높은 수준인 15~20%에 이른다. 후판 가격 인상은 곧 원가 상승으로 직결된다. 최근 연이은 수주가 수익성 증대로 이 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선가 인상, 생산성 개선 등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내 조선 3사는 이미 올해 상반기 철강사들과의 제품 가격 협상에서 톤 당 10만 원 이상을 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경쟁국인 중국의 조선소들이 부활, 추격해 오고 있는 것도 경계해야 할 점이다.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4월 중국 은 총 53척, 164만 CGT(표준선 환산 톤수)를 수주하며 세 계 1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수주량 305만 CGT의 54%에 해당된다. 한국은 119만 톤(34척)으로 점유율 39%를 기록하며 2위에 그쳤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간 우리나라 조선소들이 강세를 보였던 대형 컨테이너선 시장에서 중국 조선소들이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1~4월 1만 3,000 TEU 이 상 대형 컨테이너선의 전 세계 발주량은 636만 1,000 CGT이다. 한국이 311만 3,000 CGT를 수주하며 점유율 48.9% 를 나타냈는데, 중국이 277만 6,000 CGT(43.6%)를 거머쥐며 한국을 바짝 뒤쫓았다. 올해 1~3월 대형 컨테이너선 발주를 휩쓸던 한국이 4월 수주량이 ‘0’을 기록한 반면 중 국은 같은 달 66만 8,000 CGT를 수주하면서, 중국이 한국을 누르고 수주 1위를 차지한 것으로 업계는 풀이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최근 5년간 대형 컨테이너선 수주에서 자국 물 량 비중이 64~100%에 달했지만, 올해에는 5.7%에 그쳤다. MSC와 CMA CGM의 대량 발주 등 해외 발주가 많았 다는 뜻이어서, 더욱 주의를 끈다.
긴 불황으로 기술인력 확보 어려워져
조선해양 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하는 것 또한 중요 한 과제다.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온 우리나라 조선업계는 기술인력 부족이라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 국제해사 기구(IMO)의 친환경 규제 영향으로 친환경·스마트 선박 발 주가 늘어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현장 기술인력이 부족 해 일감을 소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조선 해양플랜트협회는 국내 대형 조선사가 친환경·스마트 선박 분야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술인력 확보 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나라 조선산업 발전의 밑거름이었던 유수 대학들의 조 선해양 관련 학과 입학 정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 역시 문 제다. 현재 국내 4년제 대학의 관련 학과·학부 입학 정원 은 1,100명 수준으로, 중국이 30개 대학에서 연간 1만 명을 배출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이 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조선 시장 주도권을 한국과 중국에 내준 일본의 우를 답습할 수 있다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돼 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 세계 조선사업의 패권을 잡고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 원동력은 우수한 설계 역량을 갖춘 전 문 엔지니어들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조선 경기가 어려워진 고 우리나라가 일본을 추월하면서부터 경쟁력 상실에 따른 실망감으로 우수 인재들이 하나둘씩 조선소를 떠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약 20년 전쯤에는 도쿄대학교 조선공학과 마 저 문을 닫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세계 조선 시장 1위 타이틀은 우리나라의 차지가 됐다. 뒤늦게 과오를 깨달 은 일본이 다시 기술인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한국 은 물론, 중국과 벌어진 격차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조선공학 관계자는 “도쿄대학교의 조선공학과가 폐과 된 지 20년이 지나면서 조선해양 부문 설계 엔지니어 양성의 중 요성을 다시금 깨달은 정부가 재개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녹 록지 않다”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 학계와 조선업 계가 일본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기술인력 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