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팁 정보를 공유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의 초석을 다지며 국가 경 제의 성장을 함께해 온 현대중공업. 그 시작점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정주영 창업자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창업자 타계 20주기이자 창립 49주년이 되는 3월, 창업자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 그룹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창립이념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조선에서 미래를 찾다 

1973년 3월 20일 울산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 시업식에서 연설 하는 정주영 창업자

현대가 조선사업을 구상했던 60년대 말, 당시 국내 경제는 외화 고갈 상태로 해외 진출을 통한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정주영 창업자는 우리나라의 풍부한 노 동력을 활용하고 현대의 해외 건설 경험을 살리면서, 동 시에 외화도 벌 수 있는 사업을 생각한 끝에 조선을 선택했다. 단순히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창업자는 조선업이 위험이 큰 업종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많은 연관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종합기계공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를 이른 시간 안에 중화학공업 체제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창업자의 판단과 실천이 울산의 백 사장을 세계 최대의 조선소로 탈바꿈시켰다.

 

울산, 우리나라 산업수도로 성장하다

1972년과 현재의 울산 미포만

1972년 3월 현대조선소가 울산 동구에 터를 잡으면서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던 미포만은 세계 조선산업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울산도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산업수도로 성장했다. 특히 2011년에는 지자체 사상 처음으로 수출 1,000억 달러 시대를 열기도 했다. 인구도 크게 늘었다. 회사 창립 당시 20만 명에 미치지 못했던 울산 인구는 1982년까지 매년 2~6만 명씩 증가해 1980년 에 50만 명을 넘어섰으며, 현재는 약 115만 명에 이른다.

 

‘현대’는 울산을 사회,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시켰다. 창업자는 1970년대에 2개 대학교와 5개 중·고교를 잇달아 설립했고 지 역 최초의 종합병원인 해성병원(現 울산대학교 병원)을 개원했다. 1990년대에는 한마음회관, 현대예술관 등 다수의 문화체육시 설을 건립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시설들은 지역사회의 중요한 인프라로서 울산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애국애족의 마음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울산 현대중공 업 정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창업자의 말이다. 현대중공업의 탄생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큰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 일본은 우리나라의 부족한 부존자원과 협소한 시장규모에 중화학 공 업은 적절치 못하고 유휴설비가 우려된다며 부정적인 전 망을 내놨다. 하지만 정주영 창업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라는 사명감 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창업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바탕으로 모든 임직원이 함께 노력한 결과, 현대중공 업은 창립 10년 만인 1983년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조선업 세계 1위에 올랐으며,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제1의 조선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
loading